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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대 길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전문의 우재혁입니다. 의사-환자-사회가 함께 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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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6. 1. 21:27 응급실24




 

너무 많이 걸었다.

 

이제는 조금만 걸어도 발바닥이 아프고 저려온다

 

3년간 너무 많이 걷고 뛰고 해서일까?

 

 

이 슬리퍼는 정확히 2년 10개월전 쯤 구입을 했다.

인턴 때 응급의학과 선배들이 슬리퍼 신고다니는 것을 어찌나 부러워했는지 나도 편한 발로 병원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인턴때는 응급실에서 1개월동안 서서 일하고 나니 발이 부어서 평소 신던 구두가 잘 안맞곤 했다.

운동화를 신고 싶었지만 윗 레지던트들 눈치 보느라 그렇게 해보지도 못했다.

 

처음에 응급의학과에 들어와 1개월 풀당(거지같이 일하고 잠만 5~6시간 겨우자고 하는 기간)을 한 뒤

이제 나도 드디어 1년차구나!!나도 슬리퍼 신고 신나게 일해야지 하면서 산 슬리퍼

 

헤드에서 4~5만원 주고 산것 같다. 슬리퍼를 이 가격주고 사본 것도 처음이고 약간 날탱이스러운 것이 맘에 들었다...
살 때만 해도 나중에 바닷가 가서 신어도 좋겠네라고 생각했다는...후후

 

하지만

 

한달 두달 세달 계속 지나가면서 이 슬리퍼의 존재는 잊혀져 갔다.

하루 종일 (진짜 24시간 걷는다)걸으며 쏟아지는 환자들에게 몸은 지치지만 다가가야 했고

내가 먼저 환자에게 가지 않으면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픈데 안봐주냐.....
도대체 이 응급실엔 의사가 없냐...
응급한 환자를 왜 오랫동안 방치하냐...


온갖 액팅을 받아왔다....이 슬리퍼와 함께.

그래서 빠르게 걷는 것이 몸에 익숙해졌고 정말 24시간씩 서있고 걷고 하다보니

푹신했던 밑창은 겨울철 갯벌처럼 단단해졌다.

날렵한 맛을 주던 옆부분의 푸르스름한 부분은 껍질이 벗겨져 겨울나무처럼 변했다.

 

지금 이 슬리퍼의 하얀색 부분은 약간 거무스름 해졌다.

자살하려고 약물 과다 복용을 하여 온 환자에게 charcoal(활성 숯, 약물을 흡착하여 주는 약)투여하다 환자가 구토를하여

신발에도 튀고 흰 가운에도 먹물을 흩뿌려 놓은 것처럼 숯이 묻었다.

죽겠다고 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신발따위는 나중에 물에 젖은 휴지로 한번 닦아 내면 그만이었다.

한번은 흰양말을 신고 슬리퍼를 신어 까맣게 젖은 양말을 갈아신지도 못한 채 24시간을 버텼던 적도 있다.

 

지금이야 후배들을 키워서 후배들이 잘 해주고 있어 이런 글을 쓸 여유도 생겼는지 모르나

아직도 내 슬리퍼는 환자에게 다가갈 때 같이 하는 동반자이다.

밑창이 주저앉아 발바닥은 아려오지만 환자에게 열심히 다가가려했던 과거의 내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오늘도 내 슬리퍼와 함께 한다.

posted by EMDrmetalkiller